← 클릭(동영상 보기)
제22부 홍순민의 궁궐과 사람들 - 임금, 門에서 백성을 만나다
"조선시대, 궁궐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은 승정원이 관리했다.
또, 자물쇠를 채우고 푸는 일은 임금을 경호하는 군인인 선전관과,
군대를 총괄하는 도총부의 낭관이 감독했다.
한 번 닫히면 함부로 열 수 없는 궁궐의 문이지만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했을까?
이때는 문을 열라는 어명을 증명하는 표신을 보이면 문을 열어주었다.
또한 궁궐 출입을 아무에게나 허용할 수는 없는 법!
궁궐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병조에서 발행하는 부신이라는 출입패가 꼭 있어야 했다.
남성은 신부, 여성은 한부라는 출입패를 지녀야 했지만, 관원들은 예외였다.
사모각대를 한 관원들은 당시의 유명인들이기 때문에 문지기들도 다 알아보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관원들이 궁궐에 드나들 때,
각자 출입하기 편한 문으로 다녔다고 생각하면 오산!
신분에 따라 드나드는 문이 정해져 있었다.
창덕궁을 예로 들면,
임금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드나들었고,
일반 관원들은 돈화문 서쪽의 작은 문 금호문을 사용하였으며,
내시는 돈화문 왼쪽에 있는 단봉문으로 출입했다.
또, 궁궐의 정문은 세 개의 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가운데는 임금이 드나들었던 어문이며,
어문의 왼쪽은 정 1품 대신이 드나들었던 동협문,
어문의 오른쪽은 양사의 언관이 드나들었던 서협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창덕궁을 관람할 때 입장하는 문은 대신이 드나들던 동협문,
나오는 문은 언관들이 드나들던 서협문으로,
당시로 보면 상당한 위상의 인물들이 드나들던 문인 것이다.
궁궐의 문은 단지 출입을 위한 시설이 아니었다.
특히 정문 앞은 임금이 백성을 불러 농사의 형편과 살아가는 사정을 묻던 곳이었으며,
기근이 들었을 때 임금이 궁궐 문 앞에 곡식을 쌓아 놓고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던 곳이다.
또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음식을 나눠주고
위로하는 호궤(?饋)를 베풀기도 했던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출입하는 기능 뿐 아니라 임금과 백성의 만남의 장이며,
왕권의 상징인 궁궐의 문 !
홍순민 교수의 궁궐과 사람들
그 마지막 이야기가 <임금, 門에서 백성을 만나다>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