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정승과 두문불출 이야기
황희정승
황희정승과 두문불출(杜門不出) 이야기 두문동(杜門洞)은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과 만수산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고려의 신하로 남기를 맹세한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고려의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과거장(科擧場)을 설치하였으나, 그들은 절개(節槪)를 지켜 과거장에 나가지 않고 개성의 북쪽 고개 마루에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걸어놓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고 합니다. 후에 그들이 넘은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조의관(朝衣冠)을 걸어 둔 곳을 괘관현(掛冠峴), 함께 은둔하였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이라고 불렀는데, 73명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이성계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두문동에 불을 질렀지만 단 한사람(황희)을 제외하고 모두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이때 죽은 사람과 그 후에 죽은 사람등 72명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하며 이때부터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문밖출입을 하지 않는 것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고사성어의 어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고 전해지며 원래의 뜻 그대로 번역하자면 두문동(杜門洞)에서 나오지 않고 세상과의 왕래를 끊다" 입니다. (요즈음은 집에 콕 박혀 있다, 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조선 건국초기에는 두문동(杜門洞)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금기하였다가,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어, 350여년이 지난 1783년(정조 7년)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겨우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제사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申珪), 신혼(申琿), 신우(申祐), 조의생(曺義生), 임선미(林先味), 이경(李瓊), 맹호성(孟好誠), 고천상(高天祥), 서중보(徐仲輔), 성사제(成思齊), 박문수(朴門壽), 민안부(閔安富), 김충한(金沖漢), 이의(李倚), 배문우(裵文祐)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조선 태조의 회유와 억압에도 의기를 꺾지 않고 미동도 없이 두문불출하던 72현은 두문동에서 황희만을 조선조정으로 보냈습니다. 고려조에 출사한 황희이지만 그의 인물됨과 창창한 앞날을 생각한 두문동 사람들이 새로운 왕조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내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문동의 고려유신들이 젊은 황희를 출사시킨 것은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굴원의 어부사 中>”란 어부의 말에 깨달음을 얻었던 굴원의 바로 그 마음, 백성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 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본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방촌 황희는 서른여덟의 나이까지 근 십년간은 면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주관과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강직하고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능력이 인정되었고 병권을 국왕에게 귀속시키는 등의 공적을 쌓으면서 태종의 신임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충녕대군(세종대왕)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였고 이에 태종의 미움을 받아 삭탈관직 되어 교하지방(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유배되었다가(1418년) 교하가 서울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남원으로 옮겨져서 5년의 유배생활을 더하게 됩니다. 이때 황희는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통루(지금의 광한루)를 만들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이 아들 세종에게 황희를 일컬어 "그만한 인물이 없으니 반드시 중용하라" 는 당부를 합니다. 1422년(세종 4년) 복직되었으며 환갑의 나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민심을 수습하고 행정을 안정시켰으며, 64세 되던 해(1426년) 이조판서와 우의정, 이듬해인 1427년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해 9월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반구정에 머물다가, 1431년 69세에 영의정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로부터 18년간(1449년까지)을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였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조선의 세종 조를 태평성대로 이끌었던 조선의 청백리 명재상으로 역사에 깊이 새겨 집니다. 그러나 황희 정승 일생에서 몇 가지 수치는 바로 두문동에서 나온 것과 자신의 사위 서달이 시골 아전 표운평을 죽인 사건을 덮으려 하다가 파직을 당한 것과(세종9.6.12~21), 제주 감목관 태석균이 잘못하여 말을 죽게 하여 사헌부에 갇히자 황희는 그를 구명하는 일을 하다 파직된 일이라고 합니다(세종12.11).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입니다. 박포는 '제 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었으나 오히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는데 얼마 후 '제 2차 왕자의 난'이 끝난 후 방간의 배후에 있었다는 이유로 참수됩니다. - 1차 왕자의 난(1398 무인정사) - 이방원이 무안대군 방번,의안대군 방석,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제거) - 2차 왕자의 난(1400 박포의 난) - 회안대군 방간, 박포 등의 측근세력 제거) 이때 박포의 아내는 도망 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와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소문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위 사실이 조금은 과장된 부분이 있다하더라도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길(道) - (가야금.대금.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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