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 이야기

남이 장군 초상화 무속인이 모시는 남이 장군
남이 장군(南怡, 1441년 ~ 1468년)의 탄생 설화
장호원읍 백족산(白足山)에 굴바위라 부르는 커다란 바위굴이 있다. 
근처에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남이 장군이 
그 절을 망하게 한 괴수(怪獸), 지네의 정기를 갖고 태어났다는 설화이다. 
옛날 이 절에는 수십 명의 스님들이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밤이면 꼭 한 사람씩 승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거듭되자 남은 승려들은 전전긍긍하여 하나씩 둘씩 떠나버리고 
마침내 스님 한 분이 홀로 남게 되었는데 
믿음이 깊은 이 스님은 사라진 승려들이 
모두 부처님이 극락으로 데려갔을 것으로 믿고 
자신도 떠나기 전에 평소 각별히 지내오던 장호원의 글방 선생인 
친구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해 두기로 하였다. 
전부터 이 괴변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오던 글방 선생은 
친구인 스님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절로 떠날 것을 권고하였으나 
스님이 듣지 않으므로 무명 옷 한 벌을 내어 주면서, 
“내가 자네에게 바라는 마지막 청이니 이 옷을 입고 가게나, 
  냄새가 좀 나더라도 절대 벗어 버리지 말고 꼭 입고 있어야 하네”
하고 간곡히 당부했다. 
<중략>
이튿날 친구의 안위가 궁금해진 글방 선생이 절에 올라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절 안은 텅텅 빈 채 친구의 간곳이 묘연했다. 
주변을 찾아보니 굴바위 앞에 거대한 지네 한 마리가 나자빠져 있고 
그 목에는 자신이 친구에게 주었던 무명옷 자락이 걸려 있는 것이었다. 
옷에 칠해 둔 독한 담뱃진 때문에 스님을 삼킨 지네도 죽었던 것이다.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백족산 허리 부근에 오색영롱한 구름이 감돌더니 
구름에서 나온 상서로운 기운이 개미실(충북 음성군 감곡면) 
남씨네 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달부터 남씨 문중에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자라니 그가 유명한 남이 장군이라 한다. 
<<출처:이천군지>> 

남이 장군과 요귀(妖鬼)
남이 장군은 태종 이방원의 외 증손자이다.
그의 할머니는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이다.
소년시절에 어느 양반집 종이 보자기로 싼 짐을 지고 가는데 
그 위에 분을 바른 여자 귀신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따라갔더니 고래 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남이는 문밖에 서서 동정을 살피면서 
필시 변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에서 갑자기 통곡소리가 들리면서 소란스러워 졌다.
남이는 그 집 하인에게 통곡하는 연유를 물어보니
이 댁 아가씨가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한다.
남이는 아까 본 그 분바른 귀신의 짓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신분을 밝히고
안채에 들어가 규수의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거기에 길에서 보았던 
바로 그 분 바른 귀신이 규수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본 남이가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 요망한 귀신아, 그 손을 썩 놓지 못할까?" 
남이의 호통에 놀란 귀신은 재빨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죽어있던 규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살아나자 
방안 사람들은 울음을 그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더 있기가 멋쩍었던 남이는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마자 또 규수가 죽었다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한 번만 더 살려달라고 붙잡았다. 
남이는 복숭아나무 회초리를 꺾어 들고 방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귀신이 규수의 가슴을 타고 앉아 목을 조르고 있었다. 
남이는 회초리로 세차게 내리치면서,
"이 요망한 귀신아, 감히 뉘 앞인데 사라지지 않느냐!" 하고 호통 치자 
귀신은 두려워하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규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살아났다. 
이 규수가 바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 수양대군(세조)의 측근인
좌의정 권람의 넷째 딸이었다. 
그날 저녁 퇴궐하여 집에 돌아온 권람은 그간의 전말을 듣고 
귀신을 쫓았다는 도령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생각했다. 
권람의 막내딸은 
사대부가의 처녀가 남자와 한방에 있었는데 어찌 부끄럽지 않겠사옵니까?
부디 소녀의 마음을 헤아려 생명의 은인인 그 도령에게 보온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때 아닌 때를 쓰니, 이를 어쩌겠는가?
권람은 명리학의 대가를 불러서 남이의 사주를 짚어 보게 했더니. 
극귀를 누릴 상이나 요절할 팔자입니다 라고 말한다.
권람은 다시 딸의 사주를 짚어 보게 했다. 
"여쭙기 어렵사오나 따님의 명도 역시 매우 짧을 듯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식도 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한다.
만일 그 도령과 백년가약을 맺는다면
그 복만 누리실 뿐 화는 보시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고심에 고심을 하던 권람은 결국 남이를 사위로 삼았다 한다.
 
남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호탕하고 성격은 외증조부 태종 이방원을 닮았다고 한다.
아버지 남빈(南?)(의령남씨)과 어머니 홍여공의 딸 사이에 
1441년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건동 126번지에서 출생하였는데, 
1456년 당시 재상이었던 권람(權擥)의 딸과 혼인을 하였고, 
1458년(세조4) 17세 때 무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21세에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1467년(세조13)에는 북관(北關)의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토벌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올랐다. 
또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였고,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1468년(예종 1년) 10월 27일 겨우 28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그의 부인 권 씨는 옥사가 있기전에 먼저 죽었다고 한다.
1818년(순조 18년) 후손 우의정 남공철 등의 상소로 복권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북정가 (北征歌)
白頭山石 磨刀盡(백두산석 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두만강수 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 大丈夫(후세수칭 대장부)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하리오!
위의 시는 
인조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이수광의 「지봉유설」속에 전해지는 
남이 장군의 4편의 시중 「백두산 웅시(雄詩)」 
또는 「북정(北征)」시로 불리는 대표적인 시로, 
젊은 장군의 호방한 기개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평정 비를 세우고 
남아의 기개(氣槪)를 노래한 ‘북정가(北征歌)’를 지었는데 
야사에서는 남이가 역심을 품었다는 대표적인 증거로 제시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 하게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천하의 간신 유자광은 
男兒 二十 未平國(남아이십 미평국)"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을
男兒 二十 未得國(남아이십 미득국)"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으로
시의 자구‘平’을 得’으로 조작 하여 남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전한다.
유자광(柳子光, 1439년? ~ 1512년 6월)
 세조때 무인으로 출사, 연산군때의 간신,무오사화의 원흉
 본관은 영광, 서얼 출신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인물, 
당시 정황으로 보아 장수로서 신하로서 나라를 어지럽힌 이시애의 난을 
20세의 젊은 나이에 평정하였음에 크게 고무되어 지었던 것인데 
이것이 역모의 근거로 탈바꿈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는 남이 장군이 
귀신도 시기할 비범한 능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세조(수양대군)가 죽고 예종(수양대군의 차남)이 등극한 후 
예종은 젊고 패기 있는 남이가 임금보다 더 비범함에 늘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는데, 천하의 간신 유자광은 남이를 역모 죄로 무고하자 
예종은 친히 친국까지 하게 된다. 이를 남이의 옥사라 한다.
<1468년(예종 1년)에 남이, 강순(康純)등이 역모의 죄로 처형당한 사건> 
예종임금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이실직고하라면서 만신창이가 
되도록 고초를 가 했으나 남이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주장 하였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때마침 영의정 강순과 눈이 마주치자 
내가 역모를 하지 않았다고 한마디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모른척하는 영의정 강순이 무정하고
원망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모진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이제는 나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거짓 자백을 하고 죽으려고 하였다.
임금이 같이 역적모의를 한자가 또 있으면 불라고 하자 
마침 곁에 있는 영의정 강순을 가리키며 
저자와 같이 공모를 했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같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강순이 "왜 나를 공범으로 죽이려고 하느냐?" 하고 물어보자
나는 앞길이 창창한 젊은 20대고 
당신은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가 80 이면 이제 살만큼 산사람인데 
함께 여진족 평정을 간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변론도하지 않는 불의는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고 한다.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음악 : 한(恨) / 김수철 해금 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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