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상원사 동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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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세조가 피부병에 걸렸을때 입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피묻은 회장저고리
(역사스페셜에 나왔던 것인데...)
1984년에 발견된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복장 유물 중에는
부처님 진신 사리와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와 남편인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아버지 세조의 쾌유를 발원한 발원문,
그리고 세조가 입었던 옷으로 보이는 저고리, 다라니 불경13권 등 23점이 있다
의숙 공주의 발원문은 푸른 비단에 붉은 주사로 쓰여져 있었으며
成化二年二月 誌라고 기록돼 있다(세조 12년 2월, 1466년)
회장저고리의 뒷 중심선 우측에 ‘장씨소대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저고리를 만든이가 세조의 후궁 중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와 상원사 동종 이야기
세조가 월정사를 참배하고 상원사로 가던 도중
신하들을 물리고 계곡에서 홀로 종 창을 드러내어 씻고 있는데,
지나가던 동승(童僧)이 거들어 주었다.
“너는 임금의 종 창을 보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임금께서도 문수동자를 보았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후 씻은 듯이 종 창이 나았다 한다.
고마움을 느낀 세조는(세조 12년 1466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위의 상원사를 확장하고
임금의 원당사찰로 만들면서
전국에서 가장 소리가 좋은 종을 찾아 안치 할 것을 명한다
전국을 수소문하던 중 당대 최고의 동종을 안동도호부 남문루에서 발견한다
동종은 경주의 에밀레 종보다 100 여년 앞서 주조된 것이라 하며
금.은.동.주석을 녹여 만든 종으로 높이 167Cm, 직경 91Cm로
용 신을 틀로 하여 사방을 구분할 수 있는 비천선녀무늬가 있고
사방에 각각 가로 세로 세 개씩 불교에서 쓰는 3 자 삼삼으로 배열된
종두(젖꼭지 모양) 서른여섯 개가 돌출하여
종의 청아한 울림을 떨리게 잡도록 함으로서
은은하고 끊어질 듯하면서도 백리까지 울려 퍼졌다 한다
원래 절의 범종이었는데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절이 쇠퇴하자
안동도호부의 시간을 알리는 관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다.
3천3백 근의 종을 나무수레에 싣고
500 여명의 호송원과 100 여 필의 말이 끌어
상원사로 옮기던 중 죽령고개를 10여 M 남겨두고 종이 꼼짝 하지 않게 되었다.
죽령고개를 넘느라 힘이 빠져서 그렇겠지 하였으나
5일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수염이 허연 어떤 노인이 말하였다.
“한낱 미물이라도 정이 있는 법인데, 한 곳에서 800년이나 지낸 종이
제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데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라는 그 말에
서른여섯 개의 종두(젖꼭지 모양)중 한 개를 잘라서 고향으로 보내
안동남문루(안동 국민은행 부근)밑에 묻고 정성껏 제를 올린 다음
죽령으로 돌아와서 "이제는 길을 떠나시죠."하며 종을 당기니
그제야 움직여 단양을 거쳐 제천, 원주, 진부령을 넘어
상원사에 안치되었다는 가슴찡한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세조의 아들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로 옮겨졌다)
상원사 동종에는
유두모양의
종두 한 개가 정말로 없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상원사(上院寺)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23년(724년)에 건립되었다.
신라시대의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상원사 동종(銅鐘)과 대리석 탑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개축한 것이다
상원사의 중심 건물은 문수전이며, 문수전 내에는 문수동자상이 있다.
문수동자상은 높이가 98cm이며,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조각하여 예술적으로도 매우 뛰어나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木造文殊童子坐象)은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조선 세조 12년(1466년)에 조성되었다.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노래 : 육십리 죽령고개/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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