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와 ‘요녀석’ 이야기
임경업 장군
조선조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2일 청 태종(淸太宗)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을 출발하여 조선을 침공한다(병자호란丙子胡亂),
이때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적은 이 길을 피하여 조선의 수도로 직행하여 진격하였고
조선은 이조판서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두 왕자(봉림대군·인평대군)를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과
남녀 귀족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문무백관(百官)을 친히 거느리고 뒤를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길을 변경하여
부득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하였다.
청 태종이 16일에 남한산성을 포위, 고립 45일만에 식량이 바닥난데다
추위로 말미암아 성안의 장병들은 기력을 잃고 원군은 도중에
청군에 격파 당함으로써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인조는 처음에 항복을 주저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부득이 1637년 정월 30일 소현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에
설치된 수항단(受降檀)에서 청 태종에게 항례(降禮)를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근세사에서 처음 겪는 치욕이었다.
[ 삼전도의 치욕
인조가 신하들과 적병들이 보고 있는 삼전도(한강의 송파나루)에서
청태종에게 구령에 맞춰 세 번 바닥에 무릎을 끓고
한 번 꿇을 때마다 세 번씩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에 부딪치는 절을 아홉 번 하게하는 항복의식,
이것을 삼전도의 치욕이라 한다 ]
- 삼궤구고두 : 세 번 바닥에 무릎을 끓고 한 번 꿇을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
소현세자부부와 봉림대군,척화파 김상헌 등은 인질로 청나라 수도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조선관에서 8년간이나 유폐되었다.
[봉림대군 : 조선 제17대 왕 효종]
인조반정
서인의 김류(金?)·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 김자점 등이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인조)을 왕으로 세운 무력 정변이다.
* 14대 선조와 인빈김씨의 3남 - 정원군(원종) - 능양군 종[제16대 인조]
인조반정(1623년)→이괄의 난(1624년)→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년)→명나라 멸망(1644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유는 친명배청이란 외교정책 실패가 결정적 이였으며
따라서 왕이 되었어 는 안될 사람이 왕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모두 당파싸움의 결과이다.
▶ 그런데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野史) 하나가 전한다.
청나라 황제(순치제)가 8년간을 청나라에서 생활하다 돌아가는
두 왕자들을 불러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하자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가 사용하는 벼루돌인 용연(龍硯)을 달라고 하여
그것을 얻게 되었고,
봉림대군은 “나는 다만 나와 같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모든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가기만 바랄 뿐입니다”라고 말하자
청나라 황제가 “봉림대군은 큰 일을 할 사람 같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두 왕자가 귀국해 인조를 뵙게 되었을 때
인조가 왕자에게 “청나라에서 얻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봉림대군에게 먼저 묻자,
봉림대군은 말하기를 “저는 다만 저와 함께 볼모로 잡혀갔던 백성들과
함께 돌아오기를 간청하여 같이 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고,
소현세자는 아뢰기를
“저는 청나라 황제가 가장 아끼는 용연을 얻어왔습니다.”하면서
벼루를 인조에게 드리니 왕은 하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한참 동안 소현세자를 내려 보다가 “뭐야! 용연석?”하고 외치면서
벼루를 소현세자의 머리를 향해 던져버렸다.
인조가 던진 벼루에 소현세자의 머리가 맞아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귀국 후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사망했다는 엉뚱한 설도 있고,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昭容趙氏 : 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 후부터 어린 사내아이를 꾸짖는 말로 ‘용연석’하던 것이 점점 변하여
요년석’또는‘요녀석’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요년석은 요녀석의 변형된 말로서 ‘요+녀석’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요’는 지시어인 ‘이’의 아어형(雅語形)이요,
‘녀석’은 ‘사내아이를 귀엽게 일컬을 때’
또는 ‘어린 사내아이를 꾸짖을 때’ 쓰는 말이다.
[ 조선조의 편년사(編年史) 중의 하나인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 돼 있으나,
인조실록에는 야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런 야사는 소현세자를 낮추고 왕이 된 봉림대군의 인품을
과대하게 부풀리기 위해서 꾸며낸 신빙성에는 다소 의문이 가는
이야기 일 가능성이 지대하다. 송백헌 칼럼 ]
* 인평대군(인조의 3남)-복녕군-의원군-안흥군-이진익-
이병익-남연군-흥선대원군-26대고종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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