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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7부 이익주의 고려 인물 열전 - 역사, 왕건을 선택하다!

"「고려사」에 실린 김관의의「편년통록」에는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 관한 설화가 소개되어 있다. 
설화를 살펴보면,
신화적인 특성과 더불어 왕건 가문의 배경을 쉽게 알 수 있다. 
신라 왕족 출신이었다가 나중에는 산신이 되는 6대조 호경, 
왕건의 증조할머니와 정을 나눠 왕건의 할아버지를 낳은 당나라 태자, 
용왕의 딸과 결혼하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등 
신라·당나라·용왕의 혈통까지 섞인 고려 왕조. 
왕건의 창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설화지만 작제건 설화를 통해 우리는, 
왕건의 집안이 개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호족이었으며, 
중국과 왕래하며 무역을 하는 가문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싸움은 지방 호족들의 지지가 중요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에 
호족 출신인 왕건은 삼국의 통일을 이루려는 다른 경쟁자들 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궁예의 장군이었던 왕건. 
궁예의 독재정치를 지켜보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918년 고려의 왕위에 오른다. 
왕건은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신라를 껴안는 정치를 폈고, 
그 덕분에 무력을 앞세우지 않으면서 신라왕이 고려에 귀부하는 성과를 얻는다. 
이것은 고려가 신라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갖게 되어 
정통성 있는 국왕이라는 의미가 생기게 된 것이다. 
936년, 후백제가 항복함으로써 드디어 완전한 통일 국가를 이룬 왕건은 
새 나라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펴 나간다. 
빈민을 구제했으며, 조세를 크게 낮춰 백성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궁궐이나 의복 등을 검소하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의 모범을 보인다. 
또한 왕건은 특이한 정책을 쓰는데 바로 숱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는 29명의 부인을 맞이하여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호족 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도 하지만 
세력기반이 약했던 왕건에게 호족만큼 든든한 지지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시대를 읽을 줄 알았고 특유의 평화와 타협 정책을 통해 
통일을 이뤄낸 태조 왕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익주의 고려인물열전 1 <역사, 왕건을 선택하다> 편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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