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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8부 이익주의 고려 인물 열전 - 염경애를 아시나요?

"고려 여성으로는 드물게 지금까지 이름 석 자가 온전히 남은 여인 염경애. 
그녀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이룬 인물은 아니지만, 
남편 최루백이 직접 쓴 묘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해짐으로써 
고려 시대 여성의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염경애의 묘지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큰 딸 귀강은 최국보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죽자 집으로 돌아왔다’ 
또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여 유골을 봉해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3년이 되었을 때 장례를 지냈으니, 
바로 아내의 아버지 묘소 곁이었다’ 라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 살거나, 
죽어서도 친정의 가족묘에 묻히는 등 고려의 여성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조선시대 후기 여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았다. 
고려시대의 결혼풍습을 살펴보면,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신부의 집에서 살았다. 
또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는 여성들의 재혼이 허용되었는데, 
심지어 재혼으로 왕비가 된 순비 허씨(충선왕의 비)라는 인물도 있었다. 
이렇듯 고려시대에는 남편을 여읜 여성의 재혼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지 않았으며, 
또한 재혼 후의 생활에서도 여성들은 새 남편을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냈다. 
명종 때 감찰어사를 지낸 이승장의 어머니는 재혼한 남편이
전 남편의 아들인 이승장에게 공부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도우라고 하자 
남편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는 일화가 이승장의 묘지명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에 
아들과 딸의 구분 없이 재산도 균등하게 상속했으며, 
집안의 제사도 아들과 딸 구분 없이 지냈다. 
우리의 지금까지 전통이라고 여겼던 조선의 전통! 
하지만 또 다른 우리의 전통이 고려에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납긴 고려 여인 염경애의 일생을 통해 본 
고려 여인들의 자유분방한 삶의 이야기가 
이익주의 고려인물열전 2 <염경애를 아십니까?> 편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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