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릭(동영상 보기)
 제35부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 그는 왜 죽었나?

"1762년(영조 38) 5월 22일.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는 십 여 가지 조항의 상소를 올린다. 
영조실록에 남아있는 6개의 조항을 보면, 
후궁 빙애를 죽인 일, 여승을 궁으로 끌어들인 일, 
궁을 함부로 떠나 평양을 다녀온 일, 북한산성으로 놀러 다닌 일, 
세자가 서울 시정에 빚을 진 일, 그리고 반란혐의가 기술되어 있다. 
영조는 나경언의 고변을 듣고 반란혐의에 관해 걱정하긴 했으나 
사도세자를 공격하려는 세력의 모략일 것이라고 보았고 
무엇보다 평소 사도세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경언의 고변에 대해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조실록을 보면, 
나경언의 고변을 듣고 세자를 폐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영조가 
어떤 ‘유언비어’를 듣고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유언비어란, 
뒤주에 갇히기 이틀 전날 밤에 사도세자가 무장한 수하들과 함께 
창덕궁 물길을 통해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간 일을 말한다. 
사도세자는 그 전부터 ‘칼을 차고 가서 아무리나 하고 싶다’는 등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 ‘유언비어’는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결단을 내린 후, 
죽은 부인 정성왕후의 혼전에 세자를 불러 놓고 대뜸 “경들도 들리는가? 
정성왕후가 변란이 호흡지간에 있다고 하지 않소” 라고 말하며 
사도세자의 반란혐의를 은연중에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이렇듯 나경언이 고했던 사도세자의 반란죄가 실제적인 위협으로 나타나자,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광증 때문인가? 당쟁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인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說, 說, 說... 
사도세자의 ‘죽음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가 정병설의 권력과 인간 5 
<사도세자, 그는 왜 죽었나?> 편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