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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6부 신병주의 조선을 뒤흔든 사건들 - 사화(士禍)의 시대

"성종 때 사관(史官)으로 활동했던 김일손은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실록으로 편찬하는 과정에서 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자신에 관한 기록이 궁금한 나머지 미리 사초를 열람한 것. 김일손의 사초에는 이극돈의 비행도 적혀있었지만 대부분 세종대의 실정을 비판한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이극돈은 이 사실을 훈구파의 중심인물인 유자광에게 알렸고, 유자광은 또 연산군에게 고했다. 이 일로, 사초 사건에 관련된 김일손을 비롯한 인물들이 처형되었고 김종직의 제자들 또한 유배시켰다. 이 일은 김종직의 문인들로 구성된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는데, 이 사건이 바로 1498년(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다. 사실, 유자광이 사화의 주모자가 된 데는 김종직과의 악연도 큰 작용을 했다. 김종직이 함양군수 시절, 관내에 유자광이 쓴 현판을 발견하고 즉시 불태워 버렸는데, 유자광 개인적으로는 20년 전에 당했던 모욕을 복수했던 셈이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언론직을 장악하고 있던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고 언론도 위축되었으며 주도권은 왕과 훈구파에게 돌아갔다. 연산군이 언론의 견제가 약화된 상황에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아 국가재정은 궁핍해졌고, 그 재정 부담을 백성과 훈구 재상들에게 지우자 재상들과 연산군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권력욕에 불탔던 연산군의 측근 임사홍은 조정에서 철저히 비밀에 부쳤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예상대로 연산군의 분노는 폭발했다.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와 정숙의를 죽이고, 성종 대의 훈구공신을 비롯하여, 사림파의 씨를 말릴 정도로 대규모의 정치적 살육이 일어났다. 바로 그 사건이 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를 폐비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 대한 광적인 복수극이었지만, 사실 연산군의 측근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온갖 방법을 기획하고 있었던 임사홍의 계략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화’라는 것은 개인의 사적인 권력욕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림파’와 기존 세력 ‘훈구파’와의 정치적 갈등, 사화! 폭군의 대명사가 된 연산군과 폭군의 시대에 일어났던 두 번의 ‘사화’에 관한 이야기가 신병주 교수의 조선을 뒤흔든 사건들 4 <사화의 시대>편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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