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 학봉의 13대 종손
퇴계학맥
퇴계 이황 →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
→ 대산 이상정 → 손재 남한조 → 정재 류치명 → 서산 김흥락
→ 석주 이상룡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의 제자는 모두 707명이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만 해도 60명에 이른다.
서산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석주 이상룡(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일송 김동삼(국민대표회의 의장),
기암 이중업(파리장서 주도), 성재 권상익(유림단 독립청원서 사건),
공산 송준필(파리장서 주도), 대개 이승희(만주 독립군),
백하 김대락(만주 독립군), 소창 김원식(만주 정의부) 등을 꼽을 수 있다.
안동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들 중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은 27명인데,
이중 학봉의 후손이 11명이나 된다.
1896년 7월22일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 분의 사촌이 김회락으로 안동지방 의병장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다 패하여 학봉 종택 다락방에 숨어계셨는데
일제에 잡히고 집안 어른들도 종택 마당에 무릅꿇리며 모욕을 당하셨다.
끝내 김회락 어른은 일제에 체포되어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기시고
총살당하셨다.)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김용환의 항일운동 방법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현재 시가로 180억원)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 가지고 집안 살림을 망해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의 이름 석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전술이었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하였던 것인데,
얼마나 완벽했던지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손이 진짜 노름꾼인 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오죽했으면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항일혁명투사,조선노동연맹과 관계),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을까.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냈던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 의하여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내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죽었지만,
근래에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와 증거들이 발견됨으로써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所懷)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면서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외동딸 시집갈 때 필요한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는
읽은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 돈이 노름해서 탕진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보니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딸의 입장에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던
김용환의 그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하건대 그 결심은
그가 10세 때 하늘같이 여겼던 조부가 왜경에게 수모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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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아버지/최명진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