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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부 홍순민의 궁궐과 사람들 -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금천교


"영조 38년.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영조에게 아들 사도세자가 반란을 꾸민다고 고발하였다. 
나경언을 국청 한다는 소식을 접한 세자는 크게 놀라 
창경궁 금천교 위에 엎드려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다. 
사도세자는 왜 하필 금천교라는 곳에서 대죄를 했을까? 
금천교 아래 흐르는 물, 
금천의 의미는 궁궐과 세상을 가르는 최후의 경계다. 
사도세자에게 금천교는 
아마도 아버지 영조의 아들로 돌아갈 수 없는 다리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는 사가(私家)에 상(喪)을 당해도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금천교에서 통곡했다. 
그리고 궁궐의 모든 관원들은 
근무시간에 금천교를 건너면 근무지 이탈로 처벌 받았다. 
금천은 궁성 다음으로 궁궐의 안팎을 구분 짓는 경계선. 
바로 그 물 그 다리에는, 궁궐은 지엄한 곳이며 
밖에서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백악산과 응봉산 자락 밑에 궁궐을 지었고, 
그 궁궐 안에 물을 끌어들여 만든 작은 개울 금천(禁川). 
궁궐 안에 금천이 흐르도록 한 것은 
‘배산임수’라는 명당의 조건을 갖추기 위함이었다. 
왕의 위상에 걸 맞는 상징물, 금천교. 
동시에 궁궐과 세상을 가르는 최후의 경계였던 금천과 금천교에 얽힌 이야기가 
훙순민 교수의 궁궐과 사람들 1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금천교> 편에서 흥미롭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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