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동웅부 현판
![](https://t1.daumcdn.net/cfile/blog/146C5A3E4E2441231F)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에 피난 온 고려 공민왕이
직접 쓴 `안동웅부(安東雄府)' 현판 입니다.
현판 ‘안(安)’자 옆에는 고려공민왕이 쓴 보배로운 붓글씨라는 의미의
‘여공민왕보묵(麗恭愍王寶墨)’이라는 글자가 작게 쓰여 있습니다.
현판은 안동민속박물관에 보관중입니다.
2. 영호루 현판
![](https://t1.daumcdn.net/cfile/blog/1109F4434E24414604)
신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목은 이색이 쓴 영호루 찬서에 "병오년(1366) 겨울에
임금이 경연에서 영호루 석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상호군 김홍경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권사복을 불러 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그 때 안동도호부의 판관 조봉랑 신자전은 아전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누의 제도가 박루(朴陋)하여서
임금이 하사할 현액을 빛나게 할 수 없음을 두려워한다고 하고,
이에 기일을 정하여 더 넓히고 더욱 물에 가깝게 하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권사복이 그 까닭을 내게 말하고 또 기(記)를 청하였다." 하였습니다.
<박장연-안동 콘텐츠박물관 학예실장>
안동 영호루
안동 영호루 한글현판(박정희대통령 친필)
한글현판이 걸려있는 영호루 전면
3. 안동 봉정사 진여문
합성사진 입니다
진여문 현판은 가로 25.5cm,
세로 65 cm 크기에 종서로 쓰여진 현판입니다.
진여문 현판 왼쪽에
"려공왕보묵 광서 8년 4월 6일 개채"
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1625년에 중수한 봉정사 극락전 사량문을 보면
그 이전 중수일이
"지정23년(1363년) 계묘 3월"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공민왕이 안동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그 이듬해 봄입니다.
진여문이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극락전 중수는 공민왕이 몽진 시
안동사람들의 환대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박장연, 저작권자명 : 안동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글자의 획이 다른 현판에 비해 성글기 때문에
여백이 많지만 송설풍의 예쁜 글씨입니다.
공민왕의 즉위 기간이었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조맹부가 왕희지체를 복고하여 창안한
개성있는 서체 즉,
송설체가 들어와서 유행하던 시기입니다.
송설체는 기본적으로 왕희지체의 전형을 바탕으로
간결, 유려, 우아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다.
공민왕은 고려 말기 서화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는데,
특히 이 송설체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4.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
![](https://t1.daumcdn.net/cfile/blog/193635404E2442140A)
무량수전은 공민왕 7년에 불타 버려 우왕 2년(1376)에 재건하였습니다.
무량수전 현판 뒷면에 공민왕 친필임을 알리는 묵서가 있는 점으로 보아
재건을 준비하는 과정에 공민왕이 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5. 봉화 청량사 유리보전 편액
![](https://t1.daumcdn.net/cfile/blog/2279004B5322738C0E)
260㎝ × 60㎝ 크기의 ‘유리보전(琉璃寶殿)’ 현판(懸板)은
왼쪽에 작은 글씨로 ‘무신국추 화산객서(戊申菊秋 花山客書 : ‘무신년(戊申年)
국화(菊花)꽃 피는 가을에 산(山)을 유람(遊覽)하는 화산객(花山客)이 쓰다’라는 뜻임)’라고 쓰여 있습니다,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이 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 왔습니다.
유리보전 편액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신국추는 1368년 가을이라는......?
<출처 : 인터넷>
노래 : 낙화암/ 주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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