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민당(恭愍堂) 또는 용상동 여랑당
[개설]
공민당은 노국공주 혹은 여랑을 모신 동제당이다.
안동시 용상동 주민들이 모셔오던 서낭당이었으나
평화사 주지(사불)의 현몽에 의해 공민당으로 개칭되었다.
‘여랑당’·‘용상동제당’이라고도 불린다.
[위치]
용상파출소 건너편의 큰 골목길을 따라 200m 정도 가면
평화사로 가는 작은 길이 있다.
노국산 평화사는 신비의 수박으로 유명한 곳 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700m 정도 가면 오른쪽에 산이 있는데,
그 기슭에 서낭당이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서낭대이(선왕대이)’,
‘서낭당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북 안동시 성곡동 1408번지, T-054-821-6244
[형태]
현재 모셔지고 있는 서낭당은 현대식 건물(당집)의 형태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집이다.
당문을 열고 정면을 바라보면 공민왕과 여랑 혹은 노국공주 라고
불리는 여자가 그려진 탱화가 걸려 있다.
그 밑에는 상이 있는데, 상 위에는 용머리 모양의 돌이 놓여 있다.
[유래]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왔을 때
한 여랑을 데리고 와서 늘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였다.
왕은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홍건적과 대치하였다.
여랑은 왕이 전황을 살피러 싸움터에 나서면 따라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홍건적이 쏜 화살에 왕이 맞을 찰나
여랑이 몸을 날려 대신 맞고 쓰러졌다.
왕은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여랑은 홍건적을 물리치고 성을 지키는 신이 되겠다고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두었다.
그 후 왕은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여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다시 환도하게 된 왕은 여랑을 잃고 떠나게 되었음을 못내 아쉬워하며
자기와 나라를 구한 여랑의 혼백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에 당집을 지어 모시도록 하였다
[의례]
매년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사불과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제사를 올린다.
동제를 지내기 전날 저녁에 금색(금줄)을 치고 당 내에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 성황당 토성 [城隍堂土城]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용상동(龍上洞) 서낭당골에 있는
고려시대의 포곡식 산성이다.
서낭당골의 높이 345m 정도 되는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산성으로,
높이 3m, 둘레 약 3.6㎞이다.
축성 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나 성 내부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으로 볼 때 신라에서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추정된다.
내탁법(內托法,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과 잡석으로 채우는 축조법)과
내외 협축법(內外夾築法)을 병행하여 축조된 토성(土城)이다.
이곳은 동쪽에서 안동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서쪽으로 안동 시가지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며
남쪽으로는 반변천(半邊川)과 마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성벽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현재 토성 내부는 주거지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성 안에는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공민당(恭愍堂)이 있다.
[출처] 성황당 토성 [城隍堂土城 ] | 네이버 백과사전
연정(戀情)/김경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