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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등령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해발 453m 박달재는 예로부터 제천에서 서울에 이르는 관행길이 나있으나
첩첩산중으로 크고 작은 연봉이 4면을 에워싸고 있어 험준한 계곡을 이룬다.
1216년(고종 3) 대요수국을 세웠던 거란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밀려온다
1217년 최충헌에 의해 전군병마사로 임명되고
박달현(朴達峴) 전투에서 거란군 수만명을 무찔러 명주 쪽으로 패주시켰다.
이곳은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대승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시호는 위열공이다
또한 천등산, 인근의 지등산, 인등산과 함께 천(天)·지(地)·인(人)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 알려져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박재홍 1948년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도라지 꽃이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본다 산울림만 외롭구나
박달재에 관련하여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이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급제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며 상경하고,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했다.
과거에 낙방한 박달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오다가 평동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가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3일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있는 힘을 다해 박달은 고개 쪽으로 달려가 금봉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천길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는 이 고개를 박달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