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풍천면 금계리 탑리마을

    마을을 굽이쳐 흐르는 계곡이 마치 비단과 같이 아름다워 금계리(錦溪里)라 하였다 한다.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마 또는 탑리(塔里)는 금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좌측부터 느티나무(수령 150년 된 보호수)아래 정자와 불상을 모셔둔 스레트집, 그리고 허물어진 전탑과 파란지붕. 경북 안동시 풍천면 금계리 575-3(탑리)

    탑골로 이어지는 작은 개울 물은 흐르지 않고, 그 옆, 흙무더기 같은 전탑의 실체. (전탑벽돌무지) 탑리의 탑이 "왜 물가에 세웠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던데 현재 탑리에 살아계시는 봉동어른(2010년 92세)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탑골 물길이 직선으로 나있어서 그곳은 그냥 평지였다고 한다."(화남의 친구들 김석한)

    허물어지고, 부서지고, 방치 된 안동시 풍천면 금계리 전탑의 실체

    벽돌과 벽돌을 접착하는 접착제가 흙으로 된 것으로 보아 초가집 담 쌓을때 사용하는 민간공법으로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건축의 조적(벽돌쌓기)에서는 접착제를 모르터(몰탈)라고 하고 줄눈간격은 10mm 정도인데...음 ~

사라호태풍이 불기전 금계리 전탑의 모습

    학자들은 금계리 화인사의 생성시기를 830년 경 즉 9세기 초로 잡고 있습니다. 화인사의 전탑은 7층이었는데 다른 전탑과 또 다른 독특한 문양의 탑이기 때문에 사라져 가는 유물에 대한 안타까움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인사의 폐사시기는 견훤시대나 고려후기로 잡는 것은 적절하지가 않습니다. 전탑이라는 것이 특징상 허물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전탑은 200년에 한 번 꼴로 복원을 시켰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진으로도 탑리의 벽돌은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벽돌로 탑이 제조되었습니다. 이것은 몇 번의 복원이 있으면서 다른 재질의 벽돌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더구나 고려말에 절이 폐사되었다면, 과연 전탑이 천년이나 넘도록, 웅장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1959년 사진에도 4,5층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출처 - 화남의 친구들 김석한 씀)

전탑의 잔해들

    무심한 바람, 모진 세월, 인고의 눈물... 이끼긴 벽돌, 깨어진 기왓장, 파편 그리고 돌과 흙

    흙무더기 같은 전탑, 그 뒤로 작고 허름한 스레트집

    허름한 스레트집에 허름하게 모셔져 있는 새로운 부처님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석재는 석탑의 부재(탑신석)인데 석탑도 존재했다는 것인데...

스레트집에 모셔졌던 도난당한 비로자나 불상(문화재청 자료)

    『경북마을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탑은 사각형으로 된 지대석(址臺石) 위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높이가 66㎝(?)의 석불을 앉혀 놓았고....,

이면에 숨겨진 안동의 부끄러운 모습

    탑리 서쪽 산기슭에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큰 절(화인사)이 있었고 절의 경내에 전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탑이 무너지면 쌓고 허물어지면 다시 쌓고 또 무너진 것을 현재의 상태로 쌓아올린 것이고. 탑의 현재 높이는 약 250㎝이며, 북쪽면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나무덩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서글픈 분노와 안타까운 마음에 스스로를 원망해 본다...이 가을에

안동 풍천면 금계리 고사마을의 만포서당

    (사진 : 2012.10.08) 밤꽃이 피는 고향/정진호

'좋은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개속에 숨다  (0) 2019.04.09
접시꽃 당신  (0) 2019.03.28
생각  (0) 2019.01.06
고향 - 노천명  (0) 2018.10.20
가을예감  (0) 2018.07.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