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과 정철의 수염 이야기
경복궁 건춘문
<이발과 정철 사이에 얽힌 수염 이야기>
이발(李潑, 1544년 ~ 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광산, 
증조부는 상의원정(尙衣院正)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낸 이달선(李達善)이고, 
조부는 홍문관박사를 지낸 이공인(李公仁)이며, 
아버지는 승정원도승지와 이조참판·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한 
이중호(李仲虎)이다. 부인은 박이(朴苡)의 딸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이조정랑, 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며 
동인 강경파의 영수가 되어 서인의 영수 정철과 대립이 심하였다. 
정여립의 옥사에 연루되자 대사간직을 스스로 사퇴하여 대죄하다가 
그가 관련이 있어서 사퇴한 것이라는 서인의 날조와 탄핵으로 
의금부로 하옥되어 국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인조반정 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이발의 부친(이중호)이 동부승지 때 
정철이 인사차 자주 들러 시사에 대한 많은 담론(談論)이 있었으나 
당적(黨籍)을 밝히지 않고 출입하였던 것이 
동인의 정보를 빼내기 위한 고의적인 간첩 행위로 받아들여져 
결국 중호 부자가 정철에게 농락당한 꼴이 되어 버렸다.
이에
이발이 과격한 성격을 자제하지 못하고 반격하기를 
정철의 누나는 인종의 귀인이요, 
누이는 선조(宣祖)의 종숙(宗叔) 계림군의 처이며 
형의 딸 조카는 선조의 귀인(貴人)이란 점을 들어 출세를 위해 
장부(丈夫)답지 못한 미인계(美人計)를 쓴 것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관직은 밝혀진바 없으나 김장생(金長生)의 부친이신 
김계휘(金繼輝)의 잔치에 다녀오다 상호 술에 만취하여 마주쳤다.
발(潑)과 철(澈), 즉 물과 불이 옥신각신 멱살잡이를 하다 
이발이 정철에게 
수염이란 장부의 표상인데 장부답지 않은 당신이 어찌 수염을 
달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정철의 수염을 뽑아버렸다. 
정철은 더 대항하지 못하고 헛참! 하면서 시(詩) 한 수 읊기를  
  수개잔발군발거(數箇殘髮君拔去 )
                 몇 가닥 남은 수염 그대가 뽑아가니,  
  노부풍채갱숙조(老夫風采更肅條)
                 노부의 풍채가 더욱 초라하구나
라고 하면서 쓴 웃음으로 헤어졌다고 한다.
정철의 수염을 뽑아버린 이발의 패기(覇氣)나 
수염을 뽑히고도 시 한 수를 읊고 간 정철의 여유 만만함은 
당대의 인물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두사람의 만남은 악연(惡緣)이었다. 
정철은 젊은 패기에 눌리고 권세에 눌려 수염을 뽑힐 수 밖에 없었지만 
사방에서 웅성대는 소문은 정철의 원한(怨恨)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 소문은 선조임금의 귀에까지 들려졌지만 
이발로 하여금 왕권(王權)을 확보한 상황이라 
비록 처삼촌격인 정철이라 해도 
이발에게 죄를 줄 수 없어 나무란 척 하고 넘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수염이란 장부의 표상(表象)이기에 예로부터 유죄(有罪)로 인정해 왔고 
태종임금 때에도 태종의 어린 외손자가 정승의 무릎에 앉았다가 
수염을 뽑아버린일 있어 어린 아이에게도 죄를 주었다는 일화도 전하고, 
또
7척의 위풍당당한 체구, 우람한 용모에 특히 수염이 아름다웠던 정중부는
거만하게 비춰졌을 만큼 자존심이 강했으나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널 만큼 처신에 신중했던 그에게 고려 인종시절 
김돈중이 정중부의 자부심이었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이 있었다. 
당장에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김돈중은 
당대의 문벌귀족 김부식의 아들이었기에 그 수모를 참고 참아야 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후 보현원에서 무신들의 참변을 피해 
감악산으로 도망치던 김돈중을 끝까지 따라가 목을 베어 버렸다한다.
꿈에도 잊지 못하던 수모를 되갚은 정중부의 일화도 전한다...
이번 사건 또한 서인들이 이발에게 죄주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나자 
정철이 극구 만류하였던 것으로 전하지만 정철은
보다 더 큰 보복(報復)을 위하여 만류하였던 것으로 상상된다.
이 사건의 전말을 전해들은 이발의 조모(祖母)인 신씨(愼氏) 부인이 
발(潑)에게 묻기를 
정철이 수염을 뽑히고 웃고 가더냐 아니면 화를 내고 가더냐 하고 묻자 
헛참! 하면서 웃고 갔다고 하였더니 이발의 조모 신씨는  
정철의 상은 호상(虎相)인데 호랑이가 수염을 뽑히고도 웃고 갔다면 
반드시 보복한다는 뜻이므로 가문에 큰 화가 미칠 것이다 
하면서 가족을 모아놓고 발과 길 형제에게 당부하기를 
앞으로 국록(國祿)을 받거든 한 푼도 재산 증식에 써서는 안 된다. 
구제사업(求濟事業)이나 세력 확보(勢力確保)에 쓰도록 하라고 
엄명(嚴命)하였다 한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9대째 청현관(즉 홍문관 弘文館)을 배출한 명문이요, 
모친이 호남(湖南)의 만석궁(萬石宮) 해남 윤(尹)씨 귤정(橘亭)의 딸이기에 
국록을 재산 증식에 쓸 리도 없지만 그렇게 당부하였고 
며느리인 윤씨 부인에게 당부하기를 
여종인 귀덕(貴德)이를 딸과 같이 돌보아주라고 신신 당부하고 
시름시름 병석(病席)에 누웠다가 곧 운명(殞命)하였다. 
그 당시에는 조모(祖母)의 심오(深奧)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나 
기축옥사를 당하면서 조모의 현명함에 매우 놀랐고 
더더욱 감탄하였던 것은 귀덕이란 여종이 상전은혜(上典恩惠)의 보답으로 
이발의 둘째 아들과 자기 아들을 바꿔치기 하여 
이발의 뒤를 계승하도록 한 데서 조모의 현명함에 놀랐다고 한다. 
광산 이씨 가문의 전설에 따르면 이발의 조모는 사서삼경에 능통하여 
발이 조모의 수학(受學)을 거쳐 김근공(金謹恭)과 
민순(閔純)에게서 학문을 사사(師事)받았다 한다. 
특히 조모는 역학(易學)에 능통하여 
세상을 꿰뚫어보는 이인(異人)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발과 정철간의 사감(私憾)은 이와 같이 맺혀졌고
결국 광산(光山) 이씨(李氏)와 연일(延日) 정씨(鄭氏)간의
문벌(門閥) 싸움으로 번졌으나 
기축옥사(1589)때 이발 가문을 멸족(滅族)으로 보복한 것은 
너무 지나쳐 부적절한 보복으로 사료된다.
송곡 이성휴 글 인용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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