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해당론(乙亥黨論, 1575년)>
- 이조전랑직을 두고 한양 서쪽에 살던 심의겸(서인)과
동쪽에 살던 김효원(동인)이 서로 다투면서 세를 형성한게
최초의 동인/서인 분당의 시작인데 을해년(1575년 선조8년)에
일어난 당쟁이라하여 이를 을해당론이라 한다.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 7년에, 문명이 높던 젊은 선비
김효원(1542~1590)이 전임자 김계휘(사계 김장생의 부친)에 의해
이조전랑으로 천거된 일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인사권이 삼정승(三政丞)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조판서(吏曺判書)에게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삼사(三司)관리들의
인사권은 이조판서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조전랑(吏曺銓郞 정랑,좌랑)의 전권으로 주어졌다.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란 청요직(淸要職)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울만큼 모든 관리의 비리非理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사정(司正)부서였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기에 三司는
정승,판서에 대하여 소신껏 감찰하고 탄핵할 수 있었으며 ,
또한 전랑(銓郞)의 전임자에게 후임자의 추천권이 주어졌다.
이를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조전랑이라는 자리는 요직중의 요직이고
특유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어
낮은 품계(品階 정오품)에 비해 중요한 관직으로 꼽히는 자리였다)
이에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 심의겸이 공식석상에서
강력한 태클을 걸고 나왔다. 이유인 즉,
명종 때 공무로 영의정 윤원형의 집에 갔을 때
그 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는 것을 봤는데
문명 있는 자가 젊은 나이에 척신(임금과 성은 다르지만 일가인 신하)에
빌붙어 아첨이나 하려 드는 것으로 보아
‘싹수가 노란’ 자이므로 이조전랑으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김효원으로서는,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던 이조민과의 친분 때문에
자주 방문하였을 따름인데 이를 빌미 삼아
심의겸이 자신을 배척하려 하니 이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없었다.
심의겸은 붕당의 장본인이지만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왕실 외척이지만
명종때는 그의 외숙인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키려 할 때 이를 막아내는 등
원래는 붕당 형성을 꺼려했던 강직한 사람이었다.
선조는 등극한지 6년이 지나도록 훈구세력에 둘러쌓여 자의(自意)에 의해
왕권을 행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훈구세력의 요구를 묵살하고
김효원을 전격적으로 이조전랑에 임명해 버린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직에서 이임할 즈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 후보로 물망에 오르게 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심충겸이
사림(士林)에 아무 명망도 없는 사람인데 단지 척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조전랑의 벼슬을 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심의겸은
‘아무려면 외척이 원흉(윤원형을 이름)의 문객만 못하겠느냐’며
되받아 쳤고, 이것이 불씨가 되어 김효원과 심의겸 간에는
극렬한 상호 비방전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한데 양자 간의 싸움이 점차 확대일로를 걷다 보니
자연히 김효원을 지지하는 쪽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쪽으로 패가 갈리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상황은
장년층과 청년층의 세대간 싸움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심의겸은 비록 척신이었으나 일찍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보호하고
그들과 교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장년층 학자이자 정치가들과 친분이 있었고(기성사림),
이에 대해서
김효원은 김종직 학파의 김근공에게 수학하였을 뿐더러
이조전랑으로 있으면서 많은 젊은 사림파를 등용하여
신진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신진사림).
이들의 시비는 선조 8년에 이르러 더욱 격렬해지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와 유생들은 모두 양 파 중 한 쪽에 붙어서
사사건건 시비를 벌이며 반목, 질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몰락한 정적(政敵) 훈구파 및 외척세력(윤원형 일파 등)을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처단할 것인가에 대한 큰 입장 차이로 인해
양 계파의 갈등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심의겸 일파는 명종 때부터 정치에 참여해 왔던 기성세대가 대부분인 관계로
훈구파와 외척의 처단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선조 때부터 새로 정치를 시작한 신진세력으로 구성된 김효원 일파는
이들의 처단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김효원은 도성의 동쪽 낙산아래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 터)에 살았기에
김효원 쪽 사람들은 동인(東人)으로 불렸고,
심의겸은 도성의 서쪽 정릉방(지금의 정동)에 살았기에
심의겸 쪽 사람들은 서인(西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인'과 '서인'의 탄생 배경인 동시에
붕당정치의 시작이요, 조선 최초 사색당파의 시작인 것이다.
약 1 여 년 동안 동서 당쟁이 극치를 이루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副提學) 이이가 상의하여
양전지계(兩全之計)로 서인의 영수(領袖) 심의겸을 개성유수로,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경흥부사로 외지에 발령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대실패작(大失敗作)이 되고 말았다.
개성은 이 나라의 중요한 고장이었으나
경흥은 함경도 한 구석에 박힌 외딴 고장이었다.
때문에 개성유수라는 벼슬은 영직이었으나
경흥부사라는 자리는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벼슬이었던 것이다.
이 조치는 두 파벌을 중재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을 높여주고 동인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비춰져
동인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고
급기야 이 조치의 장본인인 이이에게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데 그 공격의 양상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선조는
동인 측의 송응개, 박근원, 허봉을 각각 회령/강계/종성에
귀양보내는 초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 것이 이른바 ‘계미삼찬’ 사건이다.
[계미삼찬(癸未三竄)
1583년(선조 16)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이발의 처남)·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홍문관 전한(典翰) 허봉을 귀양보낸 일]
율곡이이는 이런 일련의 사건과 그리고 조정회의때
세력조정을 위해 서쪽에 앉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이는 조정자 혹은 중립자의 위치에서
어느덧 서인의 거두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자연스럽게 동인(주로 영남학파)의 거두는
이황과 조식과 서경덕,
서인(주로 기호학파)의 거두는
이이와 성혼 등 당대의 대석학들로 진용을 재편하게 되었다.
동인은 비교적 연로하고 명종 때부터 명망을 쌓아온 허엽(허균의 부친)과
서인은 박순(성리학의 대가)을 각각 종주(宗主)로 모셨고,
동인 계열을 살펴보면 류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이길,
우성전(禹性傳), 김성일(金誠一), 최영경(崔永慶), 정인홍(鄭仁弘),
김우옹,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慨), 허봉(許封), 김효원 등
서인 계열을 살펴보면 이이(李珥), 성혼, 김계휘, 조헌(趙憲), 이귀(李貴),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송익필(宋翼弼), 남언경(南彦經),
정철(鄭澈), 김천일(金千鎰), 한준(韓?), 심의겸 등
동인은 야은 길재의 영향을 받은 영남지역 선비들이 주류를 이뤄
‘영남학파’라고도 불렸고,
서인은 기호지방, 즉 경기와 충청 일대의 선비들로 이루어져
‘기호학파’로도 불렸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동인은 현실비판적인 성향이 강했고,
서인은 상대적으로 현실지향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이의 양전지계로 동서인의 영수가 없어짐에 따라
서인의 영수는 정철이 맡게 되었고
동인의 영수(領袖)는 이발이 맡게 되어 초강경파, 즉, 극과 극이 마주쳐
이이의 양전지계(兩全支計)는 뒷날 국란지계(國亂之計)가 되고 만다.
김효원의 외지 부임으로 공석이 된 이조전랑(吏曹銓郞)의 자리에
서인(西人) 측에서는 윤두수(尹斗壽)의 조카인 윤현(尹晛)을 추천하였고
동인(東人) 측에서는 이발(李潑)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두 번째로 용기를 내어
서인들의 강경한 요구를 묵살(默殺)하고
이발의 부친인 이중호(李仲虎)를 전라감사로,
이발의 처남 박근원(朴謹元)을
심의겸의 자리였던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발령하고
1576년에 이발을 이조전랑(吏曹銓郞)에 임명하면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이제는 타인/유갑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