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柳寬, 1346~1433-고려 충목왕2~조선 세종15)의 우산각
→ ‘우산각골’: 지금의 신설동·보문동에 걸쳐져 있던 옛 마을
하정로 : 세종때 우의정을 지낸 청백리 유관의 호를 딴 거리가
하정로 인데, 하정(夏亭, 여름 정자)이라는 뜻
신설동은 조선조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이었다.
'방(坊)'은
동네호수가 60여호이상 150여호에 이를 때 붙여졌던 마을단위이다.
방 밑에 '계(契)'가, 계 밑의 작은 촌락을 '동(洞)'이라 하였다.
마을에 스캔들 같은 화제거리가 떠돌면 "동네 방네 소문 났네"하는
'동네 방네.'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 말이다
숭신방안에는 신설계가 있었고,
신설계 속에 탑동(塔洞), 우선동(遇仙洞), 안암동(安岩洞), 새말(新里)
등의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성밖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유관은 도성밖 숭신방의 조그마한 오두막 집에 살았는데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고 한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어느 누구도 정승의 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가 오기만 하면 지붕이 새므로 방안에 우산을 받치고 있어야 했다.
柳政丞寬 淸貧自守 (유정승관 청빈자수)
정승인 유관은 청빈하며 분수를 지켰다
*유관(柳寬) : 세종 때 사람
*자수(自守) : 분수를 지키다. 스스로를 지키다
嘗大雨經月 屋漏如麻 (상대우경월 옥루여마)
일찍이 장맛비가 한 달이 넘게 와서 지붕이 새서
빗줄기가 삼대처럼 주룩주룩 떨어졌다
*상(嘗) : 일찍이 ~한 일이 있었다
*대우(大雨) : 큰 비. 장맛비
*경월(經月) : 한 달이 경과하다
寬 手傘庇雨 顧謂夫人曰 (관 수산비우 고위부인왈)
유관이 우산을 쓰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비우(庇雨) : 비로부터 사람을 보호한다는 뜻
無傘之家 何以能堪 (무산지가 하이능감)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까? 하니
*하이(何以) : 무얼 가지고. 어떻게
夫人曰 無傘者 必有備 (부인왈 무산자 필유비)
부인이 말하길 우산 없는 집은 반드시 대비가 있겠지요. 라 하니
寬 笑之 (관 소지)
유관이 웃었다
*지(之) : ‘그것’이라는 뜻의 대명사이나 여기서는 해석할 필요 없음
출처 : 청파극담(靑坡劇談)
그 뒤부터 동리 사람들은 유관의 집을 일러 우산각(雨傘閣)이라 불렀고,
이 동네는 우산각이 있다하여 우산각리 또는
우산각리의 발음이 변해 우선동(遇仙洞)이라 쓰기도 했다.
이 우선동에 날이면 날마다 유림(학생)들이 모여들어,
유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학문을 논의하곤 했다.
하정 유관 선생의 외손(6대손)으로서
조선시대 실학파의 선구자인 지봉(芝峰) 이수광(李睡光)은
공이 거주하던 옛 집터에 하정선생을 기리는 정자를 지은 다음
'비우당(庇雨堂)'이라는 현판을 달아
공의 덕과 인품을 후세에 전하였으며
낙산 변두리인 신설동 지역을〈우산각 골〉이라 불렸다.
그런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숭신방과
인근 인창방(仁昌坊)을 반씩 쪼개
인창방의 가운데 글자 '창'자와
숭신방의 '신'자를 합성, 창신동(昌信)이라는 이름으로,
머리 글자만 합성하여 숭인동이라는 엉뚱한 땅이름을 만들었다.
일제는 이 우산각을 주목,
도시계획을 핑계로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에서
길의 방향을 바꿔, 직선도로를 뚫었다.
지금의 '종로-왕산로-망우로'를 잇는 도로이다.
일제의 도로 개설로 우산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신설계의 이름을 따, '새로운 마을이 설치되었다'는 글뜻처럼,
신설정(新說町)이라 한 것이 오늘의 신설동이다.
여름 장마비에
방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던 하정(夏亭ㆍ여름 정자) 유관공.
그의 일화에서 선비의 청빈낙도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청백리]
유관(柳寬 1346~1433(고려 충목왕2~조선 세종1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자는 몽사(夢思)·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문화.
공민왕 18(1369)년에 성균시에 급제,
공민왕 20(1371)년 전시문과에 급제한 뒤
비서교감(秘書校勘)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세종 6(1424)년에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고,
<태조실록(太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고려사(고려사)>를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과 개수(改修)하고
또 윤회(尹淮)와 교정하여 편찬하였다.
또한 학문이 깊고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황해도 신천군 문무면의 정계서원(程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로 《하정유집(夏亭遺集)》과 《하정집(夏亭集)》이 있다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