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

 

 회니시비(懷尼是非) : 병자호란시 일어난 조선의 정치파동 

 조선 정치 철학 사상 중 유명한 논쟁 중에 ‘회니시비(懷尼是非)’란 게 있다. 
 이는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사이에 벌어진 의리론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파 간의 사화(士禍)로 이어졌다. 
 조선사의 붕당정치의 시작이요, 현대사의 당파싸움의 또 하나의 근원이다. 
 회니(懷尼)의 회(懷)는 송시열이 살던 회덕을, 니(尼)는 윤증이 살던 이성(尼城. 논산)을 말한다고 한다. 
 
 윤증은 헌종 14년. 아버지 윤선거의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송시열에게 요청했는데, 
 나중에 받은 비문의 내용이 아버지 윤선거가 비겁하다는 것이었다. 
 송시열이 윤선거를 비겁하다는것은 병자호란 때 일명 ‘ 강화도 사건’에서 비롯된다. 
 강화도 사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부인 이 씨와 함께 순절하기로 약속해 놓고, 
 부인은 “ 청군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 ”면서 목을 매 죽었는데, 
 정작 본인 윤선거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윤선거가 죽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노론 쪽에서 쓰느냐, 
 소론 쪽에서 쓰느냐에 따라[숙종실록]등 역사 기록마다 큰 차이가 있다. 
 노론 쪽에서는 ‘ 윤선거가 부인을 몰아세워 죽게 해 놓고 본인만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소론 쪽에서는 ‘ 본인이(독자 판단으로)먼저 죽었는데, 윤선거는 뒤에 왕실의 명을 수행해야 했다’보고 있다. 
 어찌됐든 윤선거는 이후 고향에 은거해 평생토록 벼슬과 재혼을 포기한 채 
 학문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강화도 사건에 속죄했다고 한다. 
 문제는 학문에 몰두한다는 것만으로 한 여인의 죽음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병자호란 시기 강화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회니시비로 이어져 
 뜻하지 않게도 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 내내 정치파동의 핵으로 작용했다. 
 “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았을 때 송시열은 남한산성에 있었는데, 
 윤선거가 일개 유자(儒者)에 불고했지만, 송시열은 대군사부의 벼슬아치였다. 
 남한산성에서 살아남은 벼슬아치가 강화도에서 살아남은 유자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비판한다. 
 병자호란으로 발생한 회니시비 논쟁은 정치 술객들의 논쟁이다. 
 이러한 논쟁은 한 마디로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치적 논쟁이다.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국가적 위란에 처했는데, 
 정치인들은 위와 같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당시 조선사회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문제는 현대 정치사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이 처했는데, 
 정치인들은 수첩공주의 인사파동과 상류사회의 성 로비사건들이 국민들의 얼굴을 뜨겁게 만들고 있으며, 
 남북한은 서로 전쟁의 위협 속에 살아가고 있다. 
 조선에서 일어난 회니시비의 당쟁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병자호란 시 인조의 치욕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우리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참다운 개혁의 길을 가야만 이 나라를 바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인터넷  [야사와 정사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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