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七層塼塔, 신세동칠층전탑) 경북 안동시 법흥동 8-1 영가지 법흥사 전탑조에 "위에는 금동 장식이 있었다. 이고가 철거하여 관청에 냈는데 녹여서 객사에 사용하는 집기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고는 법흥사지칠층전탑 뒤편에 위치한 임청각(1520년 건립)을 건립한 이명의 다섯째 아들로 말년에 유향소 좌수를 지냈습니다. 유향소[留鄕所] : 조선시대의 지방자치조직.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웠던 향촌의 단위조직. 이고는 당시 안동 향반사회에서 적지 않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임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고의 생몰년이나 법흥사지칠층전탑의 상륜 훼손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552년 4월에서 1553년 11월까지 청풍군수를 역임하였고 유향소 좌수를 지낸 것은 이 이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553년 무남독녀 외동딸을 함재 서해(徐懈 1537~1559 퇴계의 문인)선생에게 시집보낼 때 소호헌(보물 475호)을 사위에게 준 사실이 있습니다 따라서 李股의 칠층전탑 상륜 훼손 시점은 청풍군수에서 물러나 사위에게 소호헌을 물려주고 임청각으로 돌아온 1553년 11월 이후일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고가 왜~왜 전탑 전체가 아닌 상륜만을 철거해서 관청에 냈는가라는 점입니다. 상륜부가 금동제니까 금전적 보상을 받기 위해서 일까요? 아니면 부사에게 어떤 청탁을 넣기 위해서 일까요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고성이씨의 종택 임청각을 법흥사 터에 지으면서 바로 집 앞을 가로막는 칠층 전탑을 철거하지 않았다는 점 입니다. 이고의 부친 李명(호 임청각)은 탑동종파塔洞宗派의 파조가 되었고 종파의 이름에서 탑의 존재를 이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탑이 안동에서 지니는 중요성을 잘 알 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고가 부 동쪽에 있던 반구정(伴鷗亭)에 대한 시에서 "높은 집을 지어 강 머리를 눌렀다"라고 한 대목은 그 역시 찰층전탑의 중요성(비보사상)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구정 : 경북 안동시 옹정골길 81-7, 안동시 정상동에 있는데 이고의 동생 이굉이 조선 중기(1530년경)에 건립한 정자 입니다. 여기에 이고의 시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입장에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고는 당시 전탑을 훼손 하라는 외부적 압력에 직면 하였고, 고심 끝에 이고는 상륜만을 철거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이를 모면 하고 전탑을 지켜 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이고의 이런 행동은 전탑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지계로 순수한 애향의 마음에서 우러 나왔음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통도사 성보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신용철박사]의 글을 인용하면서 법흥사지칠층전탑에 대해 저도 조심스럽게 한마디 던져 봅니다. 천년의 시공을 넘어 우리가 지금 전탑을 볼 수 있는 것도 이고라는 분의 덕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 보다 더 안동을 사랑했던 분중의 한분이 이고라는 분이 아닌가 생각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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