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50호로 지정(2007.10.12)
솟을대문에 걸려 있는 松韶世莊(송소세장) 현판
송소 심호택(松韶 沈琥澤)이 지은 집이라 하여 송소고택(松韶古宅)이다.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있어서 ‘덕천동 심부자댁’으로도 불린다.
심호택은 조선 영조 때의 만석지기 재력가였던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이다.
심처대는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이다.
청송심씨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가 넷, 부마가 넷, 정승이 열셋으로 전통적인 명문대가다.
청송심씨는 심홍부(시조)의 증손인 덕부(德符)와 원부(元符) 등 크게 두 가문으로 나뉜다.
심처대는 심원부의 후손이다.
큰사랑채에서 한옥의 구조를 설명해 주시는 남창환부회장님
1880년(고종17) 즈음,
호박골(청송군 파천면 지경리)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옮기면서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바로 송소고택이다. 13년에 걸쳐 지어졌고, 규모는 99칸에 이른다.
청송심씨는 1960년대까지 9대에 걸쳐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을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더불어 영남의 대부호로 명성이 높았다.
하늘아!하늘아!!(고택 안채에서 본 하늘)
악은공 심원부(沈元符)는 고려말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洞,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에 들어가
두문불출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킨 충신이었다.
후손들도 영남과 청송 일대에 내려와 숨어 지내고 있었다.
현재 청송에 흩어져 사는 후대들은 원부의 후손이 많다.
반면에 심원부의 형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세상을 호령했다.
그의 아들 심온과 손자 심회는 3대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조선시대 3대가 정승에 오른 집안은 청송심씨, 달성서씨, 청풍김씨뿐이다.
심덕부와 심원부, 두 형제가 완전히 다른 삶을 산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자기 난로가 있는 큰사랑채에서 본 부봉
우리나라에서 99칸 집이라 하면
강릉 선교장,
보은 선병국가옥.
청송 송소고택을 ‘조선의 3대 99칸 집’으로 꼽는다.
청보군과 송생현이 합쳐졌다.
청송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엉청난 부를 가져다 준다는 산봉우리(부봉)
고택의 큰사랑채에서 솟을대문쪽을 바라보면
봉긋한 산봉우리 세개가 보이는데
여성의 탐스런 젓가슴과 닮았다고 한다
이 산봉우리가 풍수적으로 엉청난 부를 뜻한다고 한다.
사진 : 2015.07.03 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