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야기

황희정승과 김종서 이야기

허꺼비 2011. 10. 10. 15:20
황희정승과 김종서 이야기
김종서 장군은 6진(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황희정승과 김종서...이야기 세종대왕 시절, 황희 정승은 병조판서인 김종서가 조그만 잘못을 해도 어찌나 호통을 치는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맹사성 대감이 황희 정승에게 물었습니다. "김종서는 당대의 인물인데, 어째서 심하게 허물을 잡으십니까?" 황희정승이 대답하길 "이는 다 김종서가 잘 되라고 하는 일이지요. 종서는 성질이 거만하고 기운이 세서 하는일이 과감하니 후일 이 자리에 앉았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것이므로 우리가 그 기를 꺾고 깨우치게 하여 신중하게 하여야 경솔하지 않을 것이오. 결코 모욕을 주자는 뜻은 아니오." (문종때 김종서-우의정,남지-좌의정,황보인-영의정) 김종서는 육진을 개척한 당대의 명장군으로 백두산 호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나 실은 김종서는 무관이 아니고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대단한 귀재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인지가 19세에, 이덕형이 20세에 문과급제) 김종서가 북방을 지키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날 세종은 10리 밖까지 나아가 그를 맞이할 정도로 세종의 총애가 깊었다 합니다. 한양으로 돌아온 다음날 김종서가 황희에게 인사 드리러갈 때 석청(산속 바위틈에서 채취한 벌꿀) 한 되를 선물로 가져 갔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노발대발하며 "네놈이 나라를 지키라고 보냈더니 백성들을 핍박하며 뇌물이나 긁어모으다 왔느냐"고 다그치며 석청을 되돌려 보내며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일도 있었다 합니다. 또 김종서가 원로대신들을 대접하기위해 병조의 재물로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내놓았을 때, 황희정승은 김종서에게 나라의 재물을 축냈다고 불호령을 한 뒤, 병조의 실무를 맡은 관리 몇을 불러 흠씬 두들겨 패버렸다 합니다. 그 일이 있은 뒤에도 김종서는 자신의 집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또 한 번 대신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김종서는 이번에는 ‘나라 것’이 아닌 ‘내 것’으로 준비한 음식이니 거리낄 게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황희는 서릿발 같은 준엄함을 보였습니다. “그대가 사사로이 음식을 장만하여 이렇듯 올리는 것은 무엇을 뽐내고 과시하고자 함이요? 관료 사이에 사사로운 정이 거듭되면 질서가 문란해지고 바른 법을 시행키 어려워지는 것이요. 오늘 병판은 신료의 기강을 해이하게 하였으니 죄를 아니 물을 수가 없소.” 황희정승은 김종서에게 보란 듯이, 음식을 주관해온 하인 몇을 하옥시켰 버렸습니다. 세종대왕이 어느날 주석에서 말하기를 대감은 어찌하여 김종서를 그렇게 미워하고 핍박하느냐고 말하자 황희가 아뢰기를 " 쓸만한 쇠는 잘 두들겨야 좋은 칼을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훗날 황희가 죽고난후 김종서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을 했다하며 명재상 황희의 가르침에 더 겸손해지고 의리를 지켰다고 합니다. 황희 정승은 18년간의 정승자리에서 은퇴할 때, 김종서를 후임으로 천거했다고 합니다. 중국 한나라의 개국 공신인 소하는 한고조(유방)가 죽고 난 후에도 혜제 황재의 재상으로 있었습니다. 조참 장군도 한나라 개국에 큰 공적이 있었지만, 소하와 사이가 나빴습니다. 그럼에도 조참 장군은 자기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재상이 될거요." "그런 일이 있을라구요. 당신과 소하 대감은 사이가 나쁘잖아요." "소하와 사이가 나쁜 것은 사사로운 일이오 국가의 일은 공적인 일이오. 소하는 나를 추천할 것이오." 과연 소하가 죽은 후 조참은 재상이 되어 한왕조 발전에 크게 기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하와 조참의 성을 따서, 이것을 '소조의 사귐'이라고 불렀습니다. 인물을 평가할 때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할 수 있느냐가 그릇의 크기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 앞에서 사이가 좋다, 나쁘다 하는것은 그야말로 사사로운 일입니다. 공과 사를 가릴줄 아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일화는 북방의 6진을 개척한 공로로 김종서는 병조판서가 되어 6조에 들어와 거만함을 떨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의정 황희가 정승과 판서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에 미리 와서 있었는데 잠시 후, 김종서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무례하게도 김종서는 황희정승이 앞에 있는데도 거드름을 피우며 의자에 삐딱하게 앉았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바깥의 하급 관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다리 한 쪽이 짧은 모양이니 가져가서 고쳐 오너라 ` 그 한마디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사죄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합니다. 뒷날 김종서는 이렇게 술회하였다 합니다. ` 내가 육진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그때 황희 대감의 그 말씀을 듣고는 나도 몰래 등뒤에서 식은 땀이 줄줄이 흘러 내렸었네. `라고 했답니다. =============================================== 황희 1363년(공민왕 12)∼1452년(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김종서 [金宗瑞 ] | 1383년(우왕 9)∼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정치가. 본관은 순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도총제(都摠制) 김수(金?)의 아들. 형은 김종흥(金宗興).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기다릴께요 - 최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