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성석린 이야기
태조 이성계 어진
고종(高宗)9년(1872)에 조중묵(趙重默)이 모사한 익선관본.
함흥차사(咸興差使) 성석린(成石璘)의 이야기
조선 초기 이방원이 두 차례의 난을 일으켜 혈육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자,
- 1차 왕자의 난(1398 무인정사-무안대군 방번,의안대군 방석,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제거)
- 2차 왕자의 난(1400 박포의 난-회안대군 방간,박포의 측근세력 제거)
태조 이성계는 형제간의 골육상쟁과 특히
다섯째아들 정안대군 방원에게 깊이 실망하여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다.
이에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여러 차례 문안사를 파견하여 환궁을 권유했으나,
태조는 이를 거부하고 사신으로 오는 자를 모두 죽여 버렸다고
조선후기 야사의 결정판이라 하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긍익)에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그런지
실록에는 태조가 사신을 죽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태조의 환궁을 권유하려고
함흥으로 보낸 차사를 일컫는 말이다
(차사(差使) - 임금이 중요한 임무를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 벼슬, 벼슬아치)
어찌되었거나 차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세간에 퍼지면서
함흥차사(咸興差使)는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태종 이방원은 문안사를 자원한 성석린을 함흥으로 보내는데
성석린은 태조 이성계보다 세살 적지만 이성계는 성석린을 친구로 대할만큼
신뢰가 깊은 사이였다
백마를 타고 베옷 차림으로 과객같이 하고
함흥의 소요산 근처에 당도한 성석린은 태조 이성계에게 직접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다.
그랬더니 태조 이성계가 내시를 시켜 가보게 하였고
성석린(成石璘)은 내시에게
“용무가 있어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 한다.” 말하니,
내시가 돌아가서 그대로 태조 이성계에게 아뢰었다.
태조 이성계가 매우 기뻐하며 성석린을 불렀다.
태조 이성계는 친구인 성석린(초대 판한성부사=한성판윤, 태종때 영의정)과
술잔을 기우리며 자식들의 권력다툼에 탄식하고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술이 여러잔 오고 가고 할 즘
성석린은 조용히 부자간의 인륜지 도리를 설파하자
태조는 갑자기 얼굴빛이 변하며 성석린을 향하여,
그대가 그대 임금(태종)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냐? 라고
소리 지르며 대노하자 성석린은 황급히 업드려 아뢰길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 이성계는 이 말을 믿고서 성석린을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고 한다.
성석린은 함흥차사중 최초로 살아서 돌아왔다
훗날
성석린(成石璘)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다 태중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삼대를 이었고,
석린의 작은 아들 발도(發道)는 후사가 없었다고 전한다
<명신록(名臣錄)>
성석린(成石璘)의 동생이 성석용이고
성석용 - 성달생 - 성승 - 성삼문 이다
성삼문은 성석용의 증손자이고, 성석린의 종증손이다.
아무튼 그는 엉겁결에 후손들을 팔아 목숨을 부지하여
조선조 초기에 보기드문 천수를 누려 86세에 세상을 마감 했다
<출처 : 인터넷>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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